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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청년신문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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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4

충북청년신문 기자 son96005@naver.com 입력 2021/04/24 20:33 수정 2021.06.10 17:19
형극의 벌판 저쪽, 「눈물겨운 재회(再會)」로 향하는 출발점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4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1969년

 

형극의 벌판 저쪽, 「눈물겨운 재회(再會)」로 향하는 출발점

 

 


 

 

 

왜 내가 그것을 짐작할 수 있는가하면 손용대와 이덕원의 표정에는 자기 몫인 10원을 내지못하였다는 미안하고 침울한 심정이 너무나 역력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크리스머스 때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지 않기로 하였던 지난달의 결의를 들어서 앞으로는 다시 이런 낭비(?)를 하지 않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이 과연 어느 정도로 수긍이 가는 것이었는가, 그리고 손용대와 이덕원의 침울한 심정을 과연 조금이나마 위로 하였는가라는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비관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67년 1월(月) 1일(日) 경에 이 꼬마들에게 배달되도록 날자의 여유를 두어서 사관학교의 그림엽서 한 장씩을 우송하였다.

 

1967년 6월 나는 수술 후 완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4월달부터 미루어 온 봄소풍을 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미 6월이 되어 차라리 여름소풍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우리는 이 소풍을 벌써 여러차례나 의논을 하였었고, 계획하였으며, 미리부터 마음을 설레어 온 터이었다.

 

 

우리는 이번 소풍이 전번보다 더 풍성하고 유쾌한 것이 되도록 우리 청구회(靑丘會) 외(外)에 다른 그룹도 참가시켜 동행하도록 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적지를 이번에는 「백운대」 계곡으로 정하고 다른 그룹에 대한 교섭은 물론 내가 책임을 맡았다. 나는 처음에 다른 꼬마들을 참가시킬가 생각하다가 곧 이런 생각을 취소해 버렸다. 청구회가 주인이 된 소풍에 또다른 꼬마들이 곁든다는 것은 그 손님이 된 꼬마들이 비록 세심한 배려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필경 어색하고 섭섭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선 내가 지도하고 있는 이화여자대학교의 쎄미나 클럽 「청맥회(靑麥會)」에서 청구회(靑丘會)의 내력과 봄소풍의 계획을 피력하여 열렬한(?) 동의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나서 나는 육군사관생도들을 동시에 참가시키기로 작정하였다. 육사생도의 화려한 제복과 반듯반듯한 직각의 동작은 평소 우리 꼬마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시 10주의 훈련을 거쳐 육군중위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에서 경제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66년 8월 임관 직후 내가 예의 그 허술한 국민복 상의를 벗어버리고 정복 정모에 계급장을 번쩍이면서 장충체육관 앞에 나타났을 때 청구회 꼬마들이 큰 눈으로 신기해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품이란 그대로 흐뭇한 한바탕 축하회였다. 그날 나와 꼬마들이 옆으로 늘어서서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걸어가는데 저만큼에서 육군병사 하나가 차렷자세로 내게 경례를 하였다. 그 병사가 구태여 보행을 중지하고 멈추어서서 차렷자세로 정식 경례를 한 마음씨를 가히 짐작할만 하였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이 꼬마들의 뛸듯이 기뻐하는 모습에서 나도 제법 으쓱해지려는 치기를 어쩔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의 봄소풍에 육사생도들을 참가시키자는 것은 오히려 꼬마들 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기도 하였다. 나는 3학년 경제원론 시간에 강의의 분량을 일찍 끝낸 다음 생도들에게 청구회의 봄소풍 작전을 공개하여 그 참가를 희망하는 생도는 학과 시간 후 경제과 교수실로 와서 신청하도록 선전(?)하였다. 상당히 광범한 반응이 일었다. 이처럼 많은 참가 희망자가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을 나는 결코 이화여대의 「청맥회」가 동행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청구회 꼬마들에 얼킨 몇가지의 에피소드만으로서도 충분히 호감이 가는 소풍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다른 생도들보다 일찍 신청하고 그것도 6명의 1조(組)로 참가신청한 생도와 약속하였다. 그 후 많은 생도들의 신청을 무마하여 다음기회로 미루어 돌려보내느라고 상당히 오랫동안 고역을 치루었다.

 

 

 

이렇게하여 우리의 봄소풍 일행은 최종적으로 그 인원이 확정되었다. 청구회 6명, 청맥회 여학생 8명 육사생도 6명 그리고 나 이렇게 21명이었다. 그리고 각 그룹별 책임을 분담하였다. 이 책임이란 소풍에 필요한 점심과 간식에 소요되는 최소한의 준비이었는데 이미 이 분담도 참가신청 이전에 참가의 조건으로 제시된 바 있었으므로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잊지말도록 하는 이상의 다른 것은 없었다. 여학생들은 점심 식사에 필요한 주식, 부식의 준비, 육사생도들은 과자 과실 등의 간식의 준비, 그리고 청구회 꼬마들은 주빈답게 그저 아이스케-키 30개 값을 지참하는 정도로 체면유지(?) 에 그친 것이었다.

 

이 아이스케-키 값도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이 나고 말았지만 여학생들이나 육사생들보다 한 술 더 떠서 선수(先手)를 쓴 셈이되어 상당한 갈채를 받았다는 점에서 그 비용에 비하여 효과는 지극히 훌륭한 것이었다.

 

 

 

1967년 6월 ×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우리 일행은 수유리 뻐스 종점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나는 9시 30분에 문화동 입구 청구국민학교 앞에서 꼬마들과 만나서 시내뻐스를 두 번을 갈아타고 수유리 종점에 도착하였다. 먼저 와서 대기하고 있던 여학생들과 사관생도들은 우리의 도착으로 비로소 그들이 오늘의 동행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책임준비량의 완수 여부를 점검(?) 하였다. 초과달성이었다. 주·부식에 국한되었던 여학생들에게서 딸기, 과자 등속이 지참되고 있는가하면 생도들의 짐속에는 「쌀」까지 들어있었다. 일요일에 등산 또는 소풍가는 생도는 학교로부터 쌀의 정량을 지급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악착같이(?) 타 왔단다.

 

이날 청구회 꼬마들은 여학생들과 사관생도들로부터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가난한 옷차림을 낮추어보는 시선도 없었고, 가난한 옷차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의 구김새도 없이 「신나게」 놀았던 하루였다. 사관생도들은 육군사관학교로 꼬마들을 초대하겠다는 호의를 베풀었고, 여학생들은 「청구문고」에 도서를 기증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오후 다섯시경 수유리 종점에서 헤어질때까지 우리는 줄곧 의젓하게(?) 처신하면서 청구회의 위신을 손상시킴이 없도록 자제하기도 하였다. 그래서였던지 그 후 동행들로부터 각종의 찬사와 격려를 받았다.

 

 

우리는 계속 부지런히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났고 엽서와 편지를 주고 받아가며 그런대로 우리의 역사를, 우리의 애정을 키워왔던 것이다. 지금 옥방에 구속된 몸으로 이 글을 적으면서도 애석하고 어색한 이른바 실패의 쓴 기억처럼 회상되는 일이 있다. 그것은 1968년 1월(月) 3일(日)에 나는 청구회 꼬마들을 우리집으로 초대하여 간소한 회식을 갖자고 제의하여 이 꼬마들의 승낙을 받았다. 그랬었는데도 약속날인 1월(月) 3일(日) 12시(時) 동대문 실내체육관 앞에는 한녀석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초대를 위하여 어머니에게까지 이들의 한사람 한사람을 소개하여 「회식」 의 준비에 각별한 애정(愛情)을 느끼게끔 미리 터를 닦아 놓기까지 한 계제이었다. 12시(時)로부터 약 1시간 40분 동안 추운 뻐스 정류소에서 이들을 기다렸다. 처음 한시간은 12시 약속을 1시 약속으로 착오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 후 40분간은 도중의 무슨일로 좀 늦어지는 것인가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새 도합 1시간 40분을 행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흔히 약속시간보다 1시간씩이나 일찍 나타나곤 하던 이녀석들 특유의 버릇을 생각해서 근방의 가게나 담배장수에게 소상히 문의해 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나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오히려 어머님의 실망을 변호하여야 했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녀석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까닭을 정확히 알수가 없다. 사실은 그들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자체가 심히 모호한 것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나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되는 것이라 생각하였음인지, 아니면 부모들에게서 역시 동일한 까닭으로해서 금지당하였는지 … 그들의 대답과 표정은 모호하였을 뿐 분명한 「해설」이 없는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점에 나의 고충이, 그리고 그들쪽에도 하나의 고충이 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종류의 미묘한 고충이 한두번, 그나마 가볍게 노출되었던 외에 무슨 다른 곤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고작 검정고시로 가난하게 마음을 달래고 있는 이들에게 중학교의 입학금과 학비를 내가 조달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나를 상당히 우울하게 하였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서는 분명한 논리와 체계를 갖추고 이성적(理性的)으로 행동하였다고 주장할 충분한 논거가 있기는 하나, 문득 문득 눈앞에 서는 이 국민학교「7학년」 「8학년」의 꼬마들의 위축된 모습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달 100원씩 붓는 우리의 우편저금이 먼훗날 어떠한 형식으로 이 잃어버린 중학시절의 공허와 설움을 보상해 줄 수 있겠는가?

 

1966년의 이른 봄철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해후하였던 나와 이 꼬마들의 가난한 이야기는, 나의 불행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더욱 쓸쓸한 이야기로 잊혀지고 말것인지 …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고 있던 때의 일이다. 「청구회(靑丘會)」의 정체와 회원의 명단을 대라는 추상같은 호령 앞에서 나는 말없이 눈을 감고 있었다. 어떠한 과정으로 누구의 입을 통하여 여기 이처럼 준렬한 수사에서 그것이 추궁되는가. 나는 이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팔월의 뜨거운 폭양속에서 매미울음소리가 마냥 한창이었다. 나는 내 어릴적 기억속 아득한 그리움처럼 손때묻은 팽이 한 개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답변해 주었다. “국민학교 7학년, 8학년생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서울지방법원 8호 검사실에서 나는 또한번 곤혹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청구회 노래」인가!” 이 검사의 반지 낀 손구락 새에 한 장의 종이가 들려져 있었다. 거기 내가 지은 우리 꼬마들의 노래가 적혀 있었다.

 

“겨울에도 푸르런 소나무처럼

우리는 주먹쥐고 힘차게 자란다.

어깨동무 동무야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밟아도 솟아나는 보리싹처럼

우리는 주먹쥐고 힘차게 자란다.

배우며 일하는 젊은 용사들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게

나가자 힘차게 청구용사들”

 

여기서 “주먹쥐고”라는 것은 국가변란을 노리는 폭동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심각한(?) 추궁을 받았다.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끈질긴 주장이었다.

 

내가 겪은 최대의 곤혹은 이번의 전 수사과정과 판결에 일관되고 있는 이러한 류(類)의 억지와 견강부회이었다. 이러한 사례를 나는 법리해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 그 자체의 가공할 일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특정한 개인의 불행과 곤혹에 그칠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그 심각성이, 그 역사성이 복재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군법회의에서 이 「청구회 노래」의 가사를 읽도록 지시를 받고 「청구회(靑丘會)」가 잡지사 「청맥사(靑麥社)」를 의식적으로 상정하고 명명한 회명(會名)이 아니냐는 「희극적」(?) 질문을 「엄숙히」 추궁 받았다.

 

× ×

 

언젠가 먼 훗날 나는 서오능으로 봄철의 외로운 산책을 하고 싶다. 맑은 진달래 한송이를 가슴에 붙이고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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