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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청년신문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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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3

충북청년신문 기자 son96005@naver.com 입력 2021/04/24 20:10 수정 2021.04.24 20:11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는 청구의 용사들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3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1969년
 
동트는 새아침 태양보다 빛나는 청구의 용사들
 

 
 

토요일 오후 다섯시 장충체육관 앞의 넓은 광장에서 우리 일곱명은 옛친구처럼 반가이 만났다. 이미 한시간 전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녀석들의 「정성」 앞에서 나는 또한번 민망스럽고 초라할 수 밖에 없었다.
 
한시간이나 먼저 와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무모한 시간의 낭비라고 생각되기는커녕, 그들의 「빛나는 영광」처럼 또는 「영웅의 동상」처럼 높이 올려다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6시에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1968년 7월 내가 구속되기까지 극히 충실하게 이행된 셈이다. 다만 만나는 시간이 조금씩 일러지는 기현상(?)을 연출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6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들은 꼭꼭 5시경부터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약 30분 가량 일찍 나타나서 5.30에 만나게 되면 이제는 4.30분경부터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도 내쪽에서 30분쯤 더 일찍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결국 6시에 만나자는 약속은 「에스컬레이션」을 거쳐 5시로 어느듯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제야 우리는 군축회담이나 하듯 다시 6시로 되돌아갈 것을 결의하고 6시로 되돌아가면 다시 동일한 「에스컬레이션」을 거쳐서 어느듯 다섯시에 만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만나서 하는 일이란, 무슨 할 일을 만드는 일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저 만나서 서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누는 그런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그저 만난다는 사실 그것이 그냥 좋을 뿐이었다.
 
괜히 자기들끼리 시키지도 않는 달음박질 내기를 해보이기도 하고, 광장 가장자리의 난간에서 서로 떨어트릴내기를 하거나, 모자를 뺏어서 달아나기를 하는 것들이 고작이었다. 10원에 다섯 개씩 주는 아이스케키를 나누어 먹으며 우리는 난간 부근에서 약 한시간 가량을 보내고 약수동 고가를 넘어 문화동으로 올라가는 입구에까지 걸어서 내가 버스를 탐으로써 헤어지곤 하였다. 두 번째인가 또는 세 번째의 모임에서 우리는 상당히 건설적인 의견의 합치를 보았다. 그때는 문화동 입구의 작은 호떡집에서 「문화빵」(10원에 3개)을 앞에 놓고 매달 10원씩의 저금을 하자는 것이 그것이었다.
 
6명이 10원씩을 모우면 60원, 거기다 내가 40원을 더하여 매달 100원의 우편저금을 하기로 하였으며 이것은 이규한 군이 책임지고 수금과 예금 및 통장의 보관을 맡기로 하였다. 한달에 100원씩이라 할지라도 1년이면 1,200원, 10년이면 12,000원이다. 우리들은 그때 10년까지 계산하여 보았다고 기억된다.
 

그날은 공책을 한권 사서 그것을 우리의 회의록 겸 장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특기해야 할 사실은 매월 저금하는 10원은 반드시 자기손으로 벌은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는 점이다. 한달에 10원 벌이는 자신만만하단다. 물지게를 져다주기, 연탄을 날아다주기 등 산비탈 동네에 사는 어린이들이 끼어들 수 있는 노력봉사의 사례금이 우리의 수입원인 셈인데, 더러는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집안 식구들의 심부름 값이 섞여 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가난한 우리들의 고충이었다. 이렇게 하여 쌓인 우리들의 저금은 내가 구속되던, 68년 7월까지 약 2,300원이 되리라고 기억된다. 내가 66년 6,7월 육사에서 군사훈련을 받던 두달, 그리고 67년 2월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한달, 그리고 그 외에 한두번 가량 적금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언젠가 내가 받은 원고료 수입에서 그동안의 부족액 약 300원 정도를 불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조대식인가 이규승인가 자기의 무슨 수입(收入) 중에서 20원가량 초과 불입한 일도 있었다.
 
1966년 9월에 우리 「청구회(靑丘會)」 회원 중 2명이 교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이 이사를 간 것이다. 한녀석은 청량리로 또 한녀석은 용산 어디인가로 이사를 갔다. 비록 이사는 하였지만 모임이 있는날에는 장충체육관 앞에 나오겠다고 다짐을 두고 떠나 갔다는데 두 번 거푸 결석(?)을 하였다.
 

언젠가는 청량리로 이사간 이대형이가 문화동으로 놀러와서 자기도 청량리에서 친구들을 모아서 회를 만들고 신선생님의 참석을 부탁할 작정이라는 각오를 피력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 후 영영 이대형군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2명의 결원을 충원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도 10월의 모임때 여전히 충원이 되지않고 네명만이 모였다. “요사이는 좋은 아이가 참 드물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다음달까지는 꼭 “좋은 아이”를 구하여 충원(充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달에도 역시 네명 밖에 모이지 않았다. 좋은 아이 둘을 구하기는 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믄 왜 오늘 참석하게끔 하지 않았느냐는 나의 물음에 비실비실 머리를 긁적이더니 오늘 나오기는 나왔다는 것이다.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저기 저쪽길 옆의 전봇대 뒤에 서있는 아이가 바로 그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과연 길 저편의 전봇대 뒤에 꼬마 둘이 서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리자 그 두명의 꼬마는 무슨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같이 전봇대 뒤로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두명의 아이가 틀림없이 “좋은 아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있었다. 전봇대 뒤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씨야말로 딱할정도로 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전봇대 뒤에 있는 두명의 신입회원을 이리로 데려오기 위하여 네명의 꼬마가 모두 달려갔다.
내가 이 두명의 꼬마와 악수를 하고나자, 그제야 이 두명에 대한 칭찬과 자랑을 널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신입회원의 자격을 심사하거나, 가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이 없는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다만, 새로운 두명의 꼬마 친구와 인사를 하는 것이 고작임에도 불구하고 이녀석들의 표정은 그것이 무슨 커다란 관문의 통과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 날, 우리는 신입회원의 환영회를 벌이기 위하여 예의 그 호떡집으로 갔다. 나는 100원어치의 문화빵을 샀다. 신입회원 중의 한명은 이규한의 동생(이규승)이고 또한명은 반장(班長)집 아들 김정호 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모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의 처마밑과 층층대 밑에서 만났으며 겨울철에도 거르는 일없이 만났다. 회의 명칭도 꼬마들 학교의 이름을 따서 “청구회(靑丘會)”라고 정식으로(?) 명명(命名)하였다.
우리의 “청구회”가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역시 독서였다. 나는 매월 책한권씩을 회의 도서로 기증(?) 하였으며 회원 각자도 책을 한두권씩 모았다. 그리하여 <청구문고>를 만들 작정이었다.
 

<아아 무정> <집없는 천사> <로빈훗드의 모험> <거지 왕자> <푸루타크 영웅전> <소영웅> … 등등의 책들을 읽었다. 청구회의 모임은 한달에 네 번인 셈이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내가 추천한 책을 번갈아가며 낭독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그들의 독후감을 이야기 하게하고 거기에 곁들여 비슷한 이야기를 내가 들려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가끔 호떡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한사람 한사람의 걱정과 어려운 일을 서로 상의하기도 하였다. 개개인의 걱정은 역시 중학교 진학 문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학교에 진학할 경제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걱정이라는 점에서 실은 진학문제라기 보다는 사회진출문제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결론은 대체로 1,2년 뒤에 야간 중학에 입학하는 방향 또는 자격검정고시를 치루고 바로 고등학교(야간)에 진학하는 방향에로 집약(集約)되는 것이었다.
 
68년 7월까지 중학교에 진학한 회원은 조대식 1명 밖에 없었으며 또 이덕원군이 자전차포에 취직이 되었을 뿐이었다. 이덕원군이 자전차포에 취직함에 따라 우리의 모임도 종래의 마지막 토요일에서 첫째 일요일로 변경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첫째와 셋째 일요일이 이덕원군의 휴일이기 때문이었다.
 

독서 이외에 청구회 꼬마들이 한 일들도 제법 다채로운 것이었다. 이를테면, 우선 동네의 골목을 청소하는 일을 들 수 있다. 나는 그들이 한달에 몇 번씩 자기 동네의 골목을 쓸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름철과 겨울방학 때에는 매주 2,3회씩이나 골목을 청소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는,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서 미끄러운 비탈길을 고쳐 놓는 일이다. 땅에 박힌 얼음을 파내고 그곳을 층층대 모양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리고 봄철이 가까워 땅이 녹아 질퍽하게 미끄러워진 때에는 그런 곳에다 연탄재를 덮어서 미끄럽지 않도록 만드는 일도 하였다. 나는 물론 이러한 일들에 참여하였거나 그들의 업적을 직접 확인한 일은 한번도 없다. 당시 나는 종암동 산(山) 49번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내가 추천하지도 않은 일인데, 그들은 여름철이면 새벽같이 일어나서는 남산 약수터까지 줄창 마라톤을 하였다. 66년 여름과 67년 여름을 줄곧 새벽같이 뛰었던 것이다.
 
내가 이 청구용사들을 잊을 수 없는 일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1967년 2월 내가 수도육군병원에서 담낭절제 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달의 모임에 참석할 수 없노라는 사연을 간단히 엽서에 적어서 띄우면서 혹시라도 병원으로 문병오지 않도록, 곧 퇴원하게 될터이니까 절대로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그 꼬마들은 내가 퇴원할 때까지 다행히 병원에 오지 않았었다. 그러나 다음달에 우리가 만났을 때 그들이 두 번이나 찾아왔다가 두 번 모두 위병소에서 거절당하였음을 알았다. 그것도 삶은 계란을 싸가지고 왔었단다. 더욱이 나이가 가장 어린 이규승이는 평소에 길을 걸을 때에도 꼭 내 팔에 매달리며 걸었는데, 그때 제 혼자서 병원까지 왔다가 신분증이 없어서 되돌아 갔단다.
 
물론 삶은 계란은 자기들끼리 나누어 먹었겠지만 그들이 그렇게 벼르고 별렀던 서오능 소풍 때에도 계란을 싸가지고 갈 수 없을 만큼 가난한 형편을 생각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문화동에서 멀리 병원까지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간 것이었다.
 
내가 이 꼬마들로부터 꼭 한번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66년 크리스머스 때였다. 카드 1장과 금관담배 1갑이 그것이다. 아마 이 선물을 위하여 일인당 10원씩을 거두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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