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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청년신문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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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2

충북청년신문 기자 son96005@naver.com 입력 2021/04/22 15:16 수정 2021.04.22 15:19
「독수리부대」 용사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어느 통일혁명당 무기수의 수기 4-2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1969년

    

「독수리부대」 용사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시 장충체육관 앞에서 만나자

 

 

 

평소에 나한테 구박을 한번씩은 받은 녀석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일제히 지목하여 골려보려는 저의는 잔디밭 위의 봄소풍 놀이에 썩 잘 어울리는 분위기 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자꾸 나를 귀찮게 끌어내려는 녀석이 권만식이었다고 기억이 되는데 나는 그때 우리가 앉은 저쪽 능 옆에서 우리를, 특히 나를 자켜보고 있는 예의 그 여섯 꼬마들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이 꼬마들도 나의 곤경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다. 나는 드디어 권군과의 씨름을 수락하고 만장의 환호(?)를 받으며 한가운데서 맞붙잡았다. 권군은 몸집만 컸을 뿐 씨름에는 문외한 임을 당장 알 수 있었다. 나는 거푸 두번을 아주 보기좋게 권군을 던져 버렸다. 내가 권군을, 그것도 두번 계속하여, 또 아주 보기좋게 허리에 얹어 던져 버렸다는 것은 천만 뜻밖의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그것뿐이랴 뒤이어 상대하겠다는 녀석도 보기좋게 안다리 후리치기로 걷어 넘겨버렸다. 나의 응원단은 저쪽 능 옆에서 상당히 걱정하였을지도 모르는, 그 꼬마 응원단은 분명히 쾌재를 발하였을 것이다. 이 꼬마들은 물론이고 문학회의 학생들도 나의 숨은 씨름 솜씨를 알턱이 없다.

연구실에서 그저 책이나 듣고 앉아 있는 「선배」로 알려졌던 것이니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제 나의 응원단석(?)으로 개선하고 싶은 생각 밖에 없다. 그래서 꼬마들이 보지않게 사과와 과자등속을 싸가지고 흡사 전리품 실은 개선장군처럼 우리 꼬마들의 부끄러운 영접을 받았다. 나를 자기들편 사람으로 간주해 주는 그 녀석들의 칭찬, 그것은 무척 어색하고 서투른 표현에도 불구하고 가식없는 진정이었다. 나는 우선 씨름을 가르치는 것에서부터 꼬마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여 둘씩 둘씩 또 씨름을 시키고 있는데 저쪽에서 문학회 학생 한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달려와서 기념촬영을 해주겠단다. 우리는 눈앞의 돌로깎은 무슨 염소같이 생긴 석물(石物)곁에 섰다. 꼬마들 여섯명을 그 돌염소 잔등에 나란히 올라앉게 하고 나는 염소의 머리쪽에 장군(?)처럼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능 뒷쪽의 잔디밭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가 싸가지고 간 과자와 사과를 먹으면서 한참동안이나 놀고난 후에 나는 꼬마들과 헤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문학회 학생들과 둘러앉아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약 30미터 떨어진 저쪽 소나무 옆에서 꼬마들이 서있음을 알려주었다.

벌써 집으로 돌아가는 듯 한 차림이다. 아마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기 위하여 기회를 노리고 있는 참인가 보았다.

내가 그들에게로 뛰어가자 그들은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고, 그래서 사진이 나오면 한 장 보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그녀석들 중의 중학생모자를 쓴 조대식군의 주소를 나의 수첩에 적고, 나의 주소(숙명여대교수실)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로부터 한묶음의 진달래꽃을 선물(?)받았다.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서 가장 밝은 진달래 꽃빛은 항상 이때에 받았던 진달래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학생답게 일제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물론 모자도 벗고) 헤어졌다.

    

 

가칭 [독수리부대]이며, 옷차림이 똑똑지 못한 이 가난한 꼬마들과의 가느다란 인연은, 이렇게 봄철의 잔디위에서 진달래처럼 맑은 향기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짧은 한나즐의 사귐을 나는 나대로의 자그마한 성실(誠實)을 가지고 이룩한 것이었다. 나와 동행하였던 문학회 학생들은 아마 그날의 내 행위를 하나의 「장난」으로 가볍게 보았을 것이 사실이며 또 나의 그러한 일련의 행위 속에 어느정도의 장난끼가 섞여 있었던 것이, 싫기는 하지만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에 나와 헤어질때의 일 - 진달래 한묶음을 수줍은 듯 머뭇거리면서 건네주던 그 작은 손, 그리고 일제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 작은 어깨와 머리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아닐 수 없었으며, 선생으로서의 「진실」을 외면(外面)할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날의 내 행위가 결로 「장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상당히 무구(無垢)한 감명을 받고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 그들을 잊고 말았다.

그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사실, 그것이 그날의 나의 모든 행위가 실상은 한갓 「장난」에 불과 했었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서오능 봄소풍날부터 약 15일이 지난 어느날, 숙명여대의 교수실에서 강의 시작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나에게 정외과의 조교가 세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편지를 주면서 「참 재미있는 편지 같아요!」 라는 웃음섞인 말을 던지고 내가 편지를 개봉하면 어깨너머로라도 좀 보고자하는 양으로 떠나지 않는다.

그 조교가 「참 재미있는 편지」 같다고 한 이유는 겉봉에 쓴 글씨가 무척 서투른 솜씨여서 시골국민학교의 어느 어린이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에다가, 또 잉크로 점잖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 하다는 점에 있었을 것이다. 조대식, 이덕원, 손용대의 세녀석이 보낸 편지였다. 이녀석들이 바로 「독수리부대」 용사들이라는 것은 곁봉에 적힌 [문화동 산O번지]를 읽고 난 뒤에야 할 수 있었다. “꼬마친구들에게서 온 편지” 라는 짤막한 말로서 그 편지를 전해준 조교의 질문과 호기심에 못을 박아버린 까닭은 내가 그 편지로 말미암아 무척 당황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세통의 편지는 분명히 일침(一針)의 충격이요 신랄한 질책이 아닐 수 없었다. 나보다도 훨씬 더 성실하게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또 간직하고 있었구나 하는 나의 뉘우침, 그 뉘우침은 상당히 부끄러운 것이었다.

    

 

편지는 모두 세통이 똑같은 내용을, 똑같은 잉크와 펜으로 쓴 것이었는데 아마 한자리에서 서로 의논하여 손용대는 이덕원의 것을 이덕원은 조대식의 것을 조대식은 또 손용대의 것을 넘겨다 봐가며 쓴 것이 틀림없었다. 선생님을 사귀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것, 자기들 단체의 이름을 지었으면 알려달라는 것, 그때 찍은 사진이 나왔느냐는 것, 그리고 건강하시기를 두손모아 빈다는 것 등으로 적혀 있었다.

 

그 소풍 이후 약 보름가량을 나는 그들을 결과적으로 농락해오고 있었으며, 그날의 내 행위 그것마저도 결국 어린이들에 대한 무심한 「장난질」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왈칵 나의 가슴 한 모서리에 엉키어왔다. 「씨이저」를 배반한 「부루터스」는 그래도 「로-마」에 대한 애정이 그를 위로하였던가.

 

나는 강의가 끝나는 대로 즉시 서울대학교로 달려갔다. 그때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던 학생(송승호 아니면 이해익으로 기억된다)을 찾았다. 광선에 필름이 노출되어 못쓰게 되어 버렸단다. 사진이라도 가지면 나는 나의 무성의한 소행을 얼마간 만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솔직히 그들에게 사과하는 길 밖에 없다.

 

엽서를 띄웠다. 「이번 토요일 오후 다섯시 장충체육관앞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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