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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 통일애국 적색 巨頭(거두) 벽초 홍명희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노래
손종표 기자 / son96005@naver.com입력 : 2020년 09월 14일
[연재7] 통일애국 적색 巨頭 벽초 홍명희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노래


↑↑ 남북연석회의에 축사를 낭독하는 홍명희 선생 1948.04.05. 평양

홍명희 충청북도 괴산 제월리 출생 
소설 임꺽정의 옥중저자

신간회 운동을 주도했고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오산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위당 정인보와는 사돈 지간으로, 홍명희의 며느리가 정인보의 차녀 정경완 씨이다. 정경완 씨는 해방 뒤 홍명희의 뒤를 따라 북한에 남았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그의 월북 동기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노동당 군사위원회 위원, 내각 부수상 등으로 주요정치활동을 하였으며, 1948년 북한 부총리에 선출되었고, 1968년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김일성은 벽초를 극진히 존경하고 예우했다. 홍명희의 계모는 홍명희를 따라가지 않고 괴산의 집을 지키다가 6.25 전쟁 중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는데 북한군이 후퇴하는 급박한 와중에도 그 시신의 수습을 명령했을 정도였다.

 
1968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사후 북한의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신간회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활동과 문필활동을 선택, 남한출신의 중간파 인사로서 민족통일전선의 상징으로서 중용되었던 것

47년 후반부터 중도파를 중심으로 단정에 반대하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 거기서 홍명희가 매우 중요한 역할, 일반의 상식과는 달리 단순히 문인이 아니라 일찍부터 사회활동에 깊이 관여해온 가장 대표적인 현실참여 지식인이며 사회운동가였다. 구한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1888년 충북 괴산에서 명문 사대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 이광수·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울 만큼 뛰어난 재사였다. 그러나 그는 이광수나 최남선이 변절해 친일파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신간회 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끝까지 민족적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때문에 그는 일반 대중은 물론 지식인과 정파들로부터도 높이 평가되었다.

해방 후 좌우익의 끈질긴 요구에도 움직이지 않던 홍명희가 정치활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1946년 말부터였다. 그 전까지 1945년 12월 13일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1946년 2월 `전국문학가동맹`으로 개칭)의 위원장을 맡아 문학활동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46년 12월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미군정의 의도대로 입법의원이 구성되자, 그는 관선의원직을 사퇴하고 과거 신간회 서울지부 인사들과 학계·언론계·실업계 인사를 중심으로 `민주통일당`을 결성한다. 좌익 3당 합당에서 배제되거나 좌우익 어디에도 쉽게 포섭되지 않는 진보적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을 묶어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통일당 결성 후 홍명희는 여운형·안재홍 등과 함께 중도 정당의 통합문제를 논의했고, 여운형 암살 후에는 스스로 정당 통합을 주도한다. 그렇게 해서 1947년 9월 11일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는 신당발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10월 19일 민주독립당이 결성된다. 또한 1947년 후반기에는 민주독립당을 기반으로 하는 `강력한 연맹체`를 지향하는 민족자주연맹이 조직되기에 이른다.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상반기 중도파의 전선조직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민족자주연맹은 1947년 10월 1일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병로·김붕준·홍명희·이극로 등 준비위원 30명을 선출하고, 12월 20일 전국 대의원 8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천도교 강당에서 결성식을 올립니다. 민족자주연맹은 4개 연합단체, 14개 정당, 25개 사회단체 및 개인으로 구성된 말 그대로 중도파의 연합전선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중도우파·중도파·중도좌파로 분류할 수 있는 정치세력과 정당이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연합단체로는 김규식의 좌우합작위원회·시국대책협의회를 비롯, 민주주의독립전선, 미소공동대책위원회가 참가하고 있었지만, 김규식 계열이 주도하고 있었다. 정당은 대부분 군소정당이었고, 그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있는` 당은 중도좌파의 민중동맹·민주한독당·근로인민당과 중도파의 민주독립당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당들이 분파로 갈려져 있어 홍명희의 민주독립당이 지도력이나 수적으로 가장 강력했다.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은 단독정부를 저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하여 남북의 정치세력들이 모인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해가는 한 축이 되었다. 이를테면 이때부터 이미 남북협상과 남북연석회의를 위한 준비되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이미 평양을 세 번씩이나 방문해 남북한의 정치 정세와 관련해 김일성·김두봉 등 북한 최고지도부와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했고, 흩어져 있던 중도파 세력을 모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석회의가 성사되는 과정에서는 김구나 김규식이 주저하거나 힘들어할 때마다 그들을 추동하는 등 결정적 정치역할을 해냈던 것

↑↑ 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전경


손종표 기자 / son96005@naver.com입력 : 2020년 0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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